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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원풍모방 작업장에서 노동자가 기계를 다루고 있다. 장남수 제공
지난해 화제를 모은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를 몰아보기로 보았다. 서울에 내 집 한 칸 가져본 적 없는 나로서는 거리감이 느껴질 법도 한 소재였는데 깊이 몰입할 수 있었던 건 그 기저에 깔린 ‘치열한 생존’의 풍경 때문이었다. 먹고사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누구에게나 거센 풍랑을 넘는 일이라는 사실이 새삼 눈물겨웠다.
삶은 엄중하나 노동의 현실은 엄혹하다. 한국지엠 야마토게임연타 물류센터 노동자들이 덕담 주고받아야 할 새해 첫날 해고 통보를 받더니 세종호텔의 노동자는 설을 코앞에 두고 며칠 전 구속 영장이 청구되기도 했다. 다행히 구속은 피했다지만 이 혹한을 길에서 버티고 있거나 아슬아슬한 허공의 철탑에 오르는 노동자는 끊이지 않는다. 생존이 벼랑 끝이다.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서 손이라도 잡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 오리지널바다이야기 은데, 발이 무겁다.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 고백한 어느 사회학자의 책 제목이 날카롭게 가슴을 찌르는 건 나 역시 노동자 선배로서의 부채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저 빌 뿐이다. 부디 잘 버텨 주기를.
원풍모방에서 해고된 1980년 후 목구멍에 할 풀칠의 절박함으로 모집공고판 앞을 서성이던 날이 낡은 필름처럼 아 모바일야마토 련하다.
독산동과 구로동이 갈라지는 1공단 입구를 지나던 26번 버스에서 내리면 정류장 옆 구인 광고판 앞에 실업자들이 쭈뼛거렸다. 공중전화로 공장 위치를 물어 찾아가면 대개 경비실에서 안내했다. “등본 떼서 오라” “연장근로 좀 하고 일요일 특근 몇 번 하면 7만 원 정도 된다.” 시큰둥하게 실업자는 얼마든지 있으니 올 테면 오고 말테면 황금성슬롯 말라는 투였다. 몇 군데 경비실을 돌아보아도 별다르지 않았다. 사지선다 문제지의 답을 찍듯 한 곳을 선택했다. 라디오와 티브이(TV) 부속품을 조립하는 전자 공장이었다.
공단행 버스는 출근 시간 때면 그야말로 김밥 옆구리 터지듯 했다. 게다가 키가 작아 폭 파묻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출근하면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녹초가 되었다. 작업복 바다신2 다운로드 을 갈아입고 숨을 돌릴 새도 없이 따르릉 벨 소리가 울려 퍼지면 분홍색 스카프를 쓴 조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매일 작업시간 10분 전 ‘국기에 대해 경례’를 하고 애국가 1절을 부른 후 하나, 둘, 셋 사훈을 따라 외우는 조회를 하는 것이었다. 애국가에 이어 조장이 노래를 선창하면, 우리는 어색하게 손뼉을 치며 “좋아졌네, 좋아졌어”를 따라 불렀다. 하루 일당 1730원, 특근과 야근을 보태도 월 6만 원을 채우기 힘들었다. 그마저도 월급은 보름, 한 달씩 밀리기 일쑤인데 매일매일 무엇이 좋아졌단 말인지. 로봇처럼 손뼉 치며 웅얼거리는 “좋아졌네”가 공중으로 흩어질 때마다 ‘월급날이 지난 게 언제인데 왜 그건 말 안 하니!’ 속으로 부르짖으며 울분을 삼켰다. 공단의 실상과 무도한 착취를 실감할수록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으면서 활기차게 일하던 원풍모방 시절이 사무쳤다. 내 권리는 소리 낼 엄두도 하지 못한 채 라디오의 소리를 만드는 전선만 감으며 일기장에 눌러 적었다.
“호주머니엔 토큰 몇 개만 달랑거리는데 월급은 언제쯤 줄 것인가. 전선을 감고 납땜을 하며 한 달을 꼬박 채워도 봉투에 담기는 건 5만5천 원. 연탄값, 전기요금, 방세 낼 곳은 줄을 섰는데 벌 길은 아득하다. 깊어 가는 겨울 앞에 떨고 선 우리들은, 이 풍요로운 도시의 찌꺼기인가.”(‘빼앗긴 일터’, 1984)
단행본 ‘빼앗긴 일터’ 표지. 장남수 제공
그런 중에도 자취방 주인을 통해 동향 감시가 계속된다는 걸 알았다. 더구나 이제는 함께할 동료가 없었다. 그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건 기약 없는 임금체불이었다. 그러나 항의 한번 못해보고 두 손 들어버렸다.
코가 쑥 빠져있는 나를 안타까이 여긴 지인의 소개로 당시 청담동의 작은 가게였던 ‘풀무원’에서 두부 배달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또 다른 세상을 보았다. 오십 평대의 아파트 두 개를 터서 사는 사람도 있다는 소문이 얼핏 들리기도 하는 동네였다.
내 업무는 현대·한양아파트 주민들에게 두부를 배달하는 것이었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 아파트 안과 고요한 복도를 걸어갈 때면 내 발소리와 수레 끄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벨을 누른 후 열린 문틈으로 살짝 보이는 실내의 붉은 러그와 까만 피아노는 눈이 부실 정도로 생경했다. 나는 이 동네의 풍경과 섞이지 못하는 이방인이었다.
당시 풀무원은 농산물 공급 원칙이 철저했다. 새벽마다 공수된 유기농 채소를 ‘사모님’들이 사 가고, 나는 귀한 콩으로 만든 두부를 부자들의 식탁으로 날랐다. 그다지 힘들 것 없는 업무와 제대로 된 유기농 점심을 먹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공허했다. 신선한 딸기향을 실어 온 트럭 옆에서 공장의 실타래와 매캐한 기계 냄새를 생각했다. 다시 공장으로 가야지, 중얼거리면서도 용기가 없어 미적거리는 동안 몇 개의 계절이 지났다.
그러다 1982년 가을, 2년여 앞서 내가 해고당한 원풍모방에서 나를 뒤흔든 사건이 터졌다. 느닷없이 폭력배들이 노조 사무실을 짓밟았고, 저항하는 노동자 560여 명을 해고했다. 도저히 편히 밥 먹고 잠잘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 부르기라도 한 듯 풀무원에 사표를 냈다. 어쩌면 오지랖이자 팔자였다.
동료들과 함께 호소문을 뿌리고 길 위의 투쟁에 동참했다. 이십 대 초반의 여성들이자 절대다수가 기숙사생이던 해고자들은 전쟁터의 난민처럼 폐허의 땅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 속에서 나도 구속된 원풍노조 간부들의 면회를 다니고 재판을 방청하며 뭐라도 해야 했다. 싼 미역 줄기를 어지간히도 볶아먹고 짠 단무지로 얼굴색은 더 노래졌지만, 창살 너머로나마 얼굴을 마주하고 좁은 방에서 호소문을 가방에 나누는 서로를 지탱하며 몇 개월이 흐른 후 모두 낯선 곳을 향해 흩어졌다.
1984년 12월, 원풍회보 제13호. 한겨레 자료사진
주머니는 바닥이고 선배들은 감옥으로, 벗들은 천지사방 어디론가 떠나간 허전함을 꽁꽁 싸매고 성수지역의 공장에 들어갔다.
시계 줄 제조공장이었다. 0.7~0.8㎜의 작은 바늘로 정확한 치수를 맞추어 금속에 구멍을 뚫는 일을 했다. 쇳가루가 구멍으로 들어가지 않게 성분을 모르는 기름을 수도꼭지처럼 틀어놓고 일해 늘 손이 퉁퉁 불었다. 기름 독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많아 얼굴에 땀이 나도 손을 댈 수 없었다. 일당은 1710원, 물가수당과 기름수당 합하고 9시까지 연장근무 해서 한 달에 7만 원 정도였으나 결근이라도 하루 하면 월차, 생리휴가 다 없어지니 3일 치가 깎여버렸다.
공단 주변엔 방세가 더 비쌌다. 한 시간 거리의 사당동에서 아침엔 버스 위로 뛰는 게 더 낫겠다 싶을 거북이 운행으로 전전긍긍했고 야근을 마친 퇴근 버스에서는 퉁퉁 불어 터진 손이 부끄러워 손잡이를 잡지 못했다.
가느다란 핀과 쇠를 그라인드에 갈면서 오래 춥고 배고프고 외로웠다.
돌아보면 내 삶은 늘 도시의 풍경 뒤편 공단의 길 위에 있었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어져 오늘까지 왔다. 그 시대 노동의 무게는 오늘 철탑 위에 서 있는 누군가의 무게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먹고사는 일은 누구에게나 엄중하니까. 그 시간을 버티게 한 건 결국 사람의 온기였다. 시대는 달라지고 시간은 흘러도 우리는 여전히 연결되어 같은 꿈을 꾼다.
‘정의로운 글’보다는 ‘정직한 노동의 기억’을 믿으며.
장남수
지난해 화제를 모은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를 몰아보기로 보았다. 서울에 내 집 한 칸 가져본 적 없는 나로서는 거리감이 느껴질 법도 한 소재였는데 깊이 몰입할 수 있었던 건 그 기저에 깔린 ‘치열한 생존’의 풍경 때문이었다. 먹고사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누구에게나 거센 풍랑을 넘는 일이라는 사실이 새삼 눈물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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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서 손이라도 잡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 오리지널바다이야기 은데, 발이 무겁다.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 고백한 어느 사회학자의 책 제목이 날카롭게 가슴을 찌르는 건 나 역시 노동자 선배로서의 부채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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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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