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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한테 아빠로 자신의1970년대 중반, 섬유·직물 업체 원풍모방 염색과에서 한 20대 여성 노동자가 일하는 모습. 필자 제공
따지고 보면 ‘위장취업’의 원조는 1980년대 노동운동을 위해 공장에 잠입했던 대학생들이 아니라 그 이전 시기 생존을 위해 서류를 꾸몄던 어린 노동자들이었다.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나 그 목적은 달랐다. 학생들은 생산 주체인 노동자들을 운동의 동력으로 깨우치려는 혁명의 꿈을 품었고, 1970년대 가난한 집 딸들은 오빠와 남동생의 학비나 부모의 약값, 농자금을 갚기 위해 생존을 걸었다. 바다이야기게임2 대학생들은 중졸이나 고졸로 하향 서류를, 어린 노동자들은 나이를 올리는 상향 서류를 꾸몄다. 초등학교 졸업 후 열서너살 나이로는 공장 채용 기준에 미달했기 때문이다. 서울 평화시장의 경우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소녀들이 제 이름으로 들어가 미싱사를 보조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규모가 있는 공장은 서류상으로나마 법정 근로자 채용 기준을 내걸고 있었다. 따라서 야마토게임무료다운받기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이 궁여지책으로 동네 언니나 사촌 육촌의 등본을 떼어 입사서류를 내는 일이 흔했다.
내가 다녔던 섬유·직물 공장 원풍모방의 한 동료도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뒤 미장원에서 머리카락을 말고 굽 높은 구두를 신은 채 면접을 봤다고 했다. 마치고 나오다 구두 굽이 삐끗해 발목을 다쳤다던 그는 월급을 받으면 빨랫비누 릴게임꽁머니 하나를 사고 나머지는 집으로 부쳤다. 이렇게 입사한 노동자들은 작업 중에 동료나 관리자가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늦어 면박을 듣기 일쑤였다. 제 이름이 아닌 조합원이 많다는 사실을 파악한 원풍모방 노동조합에서는 노사협상 교섭을 통해 ‘진짜 이름 찾아주기’에 합의했다. 일정 기간 본인의 등본을 가져오면 서류를 정정해 준 것이다. 그러자 또 다른 혼란이 생겼다. 바다이야기게임사이트 제 나이를 찾고 보니 그동안 친구로 지냈던 동료와 서너살 차이가 난 것이다. 나보다 어린애를 언니라고 불렀네, 당혹감이 교차했다. 이름은 바로잡았으나 입에 익은 습관 탓에 도무지 언니 소리가 나오지 않은 당사자 또한 옆에 가서 툭툭 치기만 하던 모습이 그 시절 웃픈 풍경의 하나였다.
개별적인 위장이 생존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면, 기업에 릴게임바다이야기 의한 집단 채용은 계산된 전략이었다.
“1960년대 후반쯤 원풍모방 노무과장이 강원도 가서 차로 실어 온 적 있어. 초등학교 막 졸업한 열댓살도 안 된 애들 40여명을 버스 한대에 태우고 와서 한꺼번에 현장에 풀어놓았어. 남해 사람인 사장도 자기 고향에서 대거 데려왔지. 거기선 박○○이 엄청나게 잘나가는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서 애기들도 이름을 다 알 정도였대. 그런데 어린애들이 와서 보니 공장 일이 들은 것보다 너무 힘든 거야. 오래 못 버티고 많이들 도로 내려갔어. 사장 말만 듣고 왔는데 12시간씩 야간 일도 시키고 하니 너무 힘들어했어. 박○○이 그 ××, 그 ××, 이러더라고. 자기들 속였다고.”
제주도 출신 사장이 경영한 구로공단의 한 지퍼 공장도 비슷했다. 사장은 비행기까지 태워 데려온 고향 소녀들을 기숙사에 입소시킨 후 나일론 실로 짜서 번들번들 광택이 나는 다후다 이불을 제공했다. 다음달 월급봉투를 받아본 소녀들은 기숙사비는 그렇다 쳐도 싸구려 이불값조차 공제되어 있어 당혹했다. 사장이 고향에서 풀어놓은 선전과는 다르게 작업 환경도 열악했다. 소녀들은 뒤에서 욕을 많이 하다가 많은 숫자가 “차라리 물질하크라(해녀 하겠다)”며 돌아가 버렸다.
욕이야 하든 말든 이런 채용 방식은 기업주에게 일거양득이었다. 대규모 인력을 한번에 확보함은 물론 노사 분규 시 가족주의나 애향 정서를 부추겨 불만을 잠재우는 회유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연고가 없는 청년들은 공장의 불빛만 따라 완행열차를 탔다. 이들의 취업 수단은 주로 공단 입구의 게시판이나 전봇대였다. 제조업이 주를 이룬 시대라 어디든 일자리는 많았다. 게시판에 굵은 글씨로 업종, 전화번호, 모집인원 ○○명 등이 붙어 있었다. 한뼘 공간조차 차지하지 못한 영세 공장 광고는 골목 전봇대에 다닥다닥했다. 구직자들은 전봇대를 빙빙 돌며 덕지덕지 붙어 있는 전화번호를 적은 후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한곳 한곳 엑스 표시나 동그라미를 그리며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취업에 성공한 노동자는 친구들이나 형제자매를 불러들였다. 하지만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다 인격적 모독이 비일비재하던 시절, 한 직장에서 오래 버티기는 힘들었다. 공장들은 일년 내내 모집공고를 붙여 두고는 달을 못 채우고 나가면 임금을 주지 않았다. 월급 받으러 두번 세번 가다 결국 포기하고 마는 게 대부분이었다. 임금을 떼먹히면서도 노동자들은 좀 더 조건이 낫다고 소문 난 공장의 모집 시기를 눈여겨보다 우르르 몰려다녔다. 공단의 굴뚝 위를 날며 불을 찾아 헤매는 불나방처럼.
하지만 노동조합이 결성된 공장은 달랐다. 투쟁을 통해 임금과 복지 수준이 높아진 이 공장들은 웬만큼 규모도 있었기에 노동자들 사이에서 명문대만큼이나 선망하는 일터가 되었다. 구로공단의 원풍모방, 콘트롤데이타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성장의 바탕으로 삼은 국가는 노동조합을 혹독하게 탄압했다. 결국 민주적으로 운영하던 노동조합들은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에 산산이 깨졌다. 국가기관이 배포한 해고노동자 명단 ‘블랙리스트’는 관리자의 서랍 안에서 수시로 나와 이들을 생존의 땅에서 내몰았다. 국가가 지목한 불순분자가 된 나도 구로공단과 성수동 공장을 돌다 1987년 전국 노동자 대투쟁 후 양대 조선소가 있는 거제도로 향했다. 그곳의 남성 노동자 취업 형태는 1970년대 여성 노동자들과는 달랐다.
1980년대 초반, 고교 학력을 인정해줬던 한독부산직업훈련원 졸업식에서 한 청년이 상장을 받고 있다. 1971년 설립된 한독부산직업훈련원은 한-독 기술협정에 따른 독일의 원조로 지어졌으며, 중공업 노동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필자 제공
섬유나, 가발산업 등 경공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며 여성 노동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기도 했다. 반면 중화학·방위산업이 육성되면서 남성 인력 수요가 커졌다. 이리공업고등학고, 창원기계공업고등학교, 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 등이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미국의 지원이나 일본과의 협정 등으로 직업훈련원들이 설립되었다. 1971년 먼저 설립된 한독부산직업훈련원은 한-독 기술협정에 따른 독일의 원조로 지어져 수업에 사용되는 공구들도 독일에서 많이 제공했다고 한다. 수업료와 기숙사가 무상 제공되었으나 엄격한 규율과 기숙사 내 선배들의 억압을 못 견뎌 도망가는 학생도 더러 있었다는데 3년 과정을 수료하고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면 방산 중공업 분야로 취업할 수 있었다. 5년 이상 근무를 조건으로 4주간 군사훈련을 받으면 병역면제 산업 전사가 되었다. 정수직업훈련원, 대전직업훈련원 등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지금은 한국폴리텍 대학으로 전환 통합되었다. 아무튼 당시 공고와 훈련원이 배출한 노동자들이 1980년대 중화학공업의 밑바탕이었고, 이들은 1987년 전국 노동자 대투쟁의 전면에서 깃발을 들었다. 1980년 초반의 해고노동자인 나는 노동단체 홍보담당자로서 카메라와 수첩을 들었다.
며칠 전 동네 중식집에서 기계로 주문하고 로봇이 서빙하는 해물짬뽕을 먹었다. 수저는 식탁 서랍에 있고 단무지와 깍두기는 셀프였다. 들어가고 나올 때 먼 거리의 주방에서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말소리만 들었을 뿐 사람의 온기는 느낄 수 없었다. 텅 빈 홀에서 로봇만 마주하고 나오니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에이아이(AI)발 일자리가 청년에게 더 위협적’이라는, 사례와 수치로 분석한 기사를 본 적 있다. 실제로 전봇대 구인 광고를 지워 가며 동료의 손을 잡았던 연대의 시대는 멀어지고 기계와 일자리를 다투는 고립의 시대가 코앞에 와 있음을 자주 실감한다. 문명 첨단의 시대인 지금은 위장취업도, 러다이트 운동도 할 수 없는 노릇인데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우리의 청년들은 어찌해야 하나?
장남수
따지고 보면 ‘위장취업’의 원조는 1980년대 노동운동을 위해 공장에 잠입했던 대학생들이 아니라 그 이전 시기 생존을 위해 서류를 꾸몄던 어린 노동자들이었다.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나 그 목적은 달랐다. 학생들은 생산 주체인 노동자들을 운동의 동력으로 깨우치려는 혁명의 꿈을 품었고, 1970년대 가난한 집 딸들은 오빠와 남동생의 학비나 부모의 약값, 농자금을 갚기 위해 생존을 걸었다. 바다이야기게임2 대학생들은 중졸이나 고졸로 하향 서류를, 어린 노동자들은 나이를 올리는 상향 서류를 꾸몄다. 초등학교 졸업 후 열서너살 나이로는 공장 채용 기준에 미달했기 때문이다. 서울 평화시장의 경우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소녀들이 제 이름으로 들어가 미싱사를 보조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규모가 있는 공장은 서류상으로나마 법정 근로자 채용 기준을 내걸고 있었다. 따라서 야마토게임무료다운받기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이 궁여지책으로 동네 언니나 사촌 육촌의 등본을 떼어 입사서류를 내는 일이 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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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 고교 학력을 인정해줬던 한독부산직업훈련원 졸업식에서 한 청년이 상장을 받고 있다. 1971년 설립된 한독부산직업훈련원은 한-독 기술협정에 따른 독일의 원조로 지어졌으며, 중공업 노동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필자 제공
섬유나, 가발산업 등 경공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며 여성 노동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기도 했다. 반면 중화학·방위산업이 육성되면서 남성 인력 수요가 커졌다. 이리공업고등학고, 창원기계공업고등학교, 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 등이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미국의 지원이나 일본과의 협정 등으로 직업훈련원들이 설립되었다. 1971년 먼저 설립된 한독부산직업훈련원은 한-독 기술협정에 따른 독일의 원조로 지어져 수업에 사용되는 공구들도 독일에서 많이 제공했다고 한다. 수업료와 기숙사가 무상 제공되었으나 엄격한 규율과 기숙사 내 선배들의 억압을 못 견뎌 도망가는 학생도 더러 있었다는데 3년 과정을 수료하고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면 방산 중공업 분야로 취업할 수 있었다. 5년 이상 근무를 조건으로 4주간 군사훈련을 받으면 병역면제 산업 전사가 되었다. 정수직업훈련원, 대전직업훈련원 등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지금은 한국폴리텍 대학으로 전환 통합되었다. 아무튼 당시 공고와 훈련원이 배출한 노동자들이 1980년대 중화학공업의 밑바탕이었고, 이들은 1987년 전국 노동자 대투쟁의 전면에서 깃발을 들었다. 1980년 초반의 해고노동자인 나는 노동단체 홍보담당자로서 카메라와 수첩을 들었다.
며칠 전 동네 중식집에서 기계로 주문하고 로봇이 서빙하는 해물짬뽕을 먹었다. 수저는 식탁 서랍에 있고 단무지와 깍두기는 셀프였다. 들어가고 나올 때 먼 거리의 주방에서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말소리만 들었을 뿐 사람의 온기는 느낄 수 없었다. 텅 빈 홀에서 로봇만 마주하고 나오니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에이아이(AI)발 일자리가 청년에게 더 위협적’이라는, 사례와 수치로 분석한 기사를 본 적 있다. 실제로 전봇대 구인 광고를 지워 가며 동료의 손을 잡았던 연대의 시대는 멀어지고 기계와 일자리를 다투는 고립의 시대가 코앞에 와 있음을 자주 실감한다. 문명 첨단의 시대인 지금은 위장취업도, 러다이트 운동도 할 수 없는 노릇인데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우리의 청년들은 어찌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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