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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seastorygame.top진안의 마이산은 계절마다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다. 겨울철에는 암봉이 먹을 찍은 붓의 형상이라 해서 문필봉이라 불렀다. 겨울 마이산은 먹을 찍어 그린 수묵화처럼 보인다.
진안=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2026년은 병오년이다. 병오(丙午)는 ‘갑을병정…’ 하는 천간(天干·하늘의 기운)과 ‘자축인묘…’하는 지지(地支·땅의 작용)를 순서대로 조합한 60갑자 중 하나다. 천간에서 병(丙)은 ‘오행(五行)에서 불(火)’의 성질을 릴게임온라인 가졌다. 지지의 오(午)는 말인데, 말 역시 불의 기운을 품었다. 병오년에서 병도, 오도 다 불이란 얘기다. 불의 상징색은 붉은색.병오년, 올해를 ‘붉은 말의 해’라 부르는 이유다.
# 기원으로 두 손을 모으게 하는 곳
새해가 밝았다고 해서 당장 병오년은 아니다. 사주명리학에서는 설날(음력설)이 기준인 것도 아니다. 명리 바다이야기APK 학의 갑자 구분은 24절기 중 하나인 입춘(立春)이 기준이다. 2026년 신년의 입춘은 설날보다 13일 앞선 양력 2월 4일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때부터가 병오년, 붉은 말의 해의 시작이라는 얘기. 사주를 믿는 이들에게 그렇다는 것이지 통념으로는 해가 넘어가면, 혹은 설이 지나면 다들 그냥 병오년으로 친다.
말은 역동적이다. 붉은색도 열정 릴게임5만 과 생명을 상징하는 색이다. 붉은 말의 해인 병오년에서 떠올려지는 건 ‘거침없이 질주하는 뜨거운 생명력’이다. 그 기운에 딱 맞는 신년 여행지가 있다. 마이산(馬耳山)이 있는 전북 진안이다. 말 귀 형상의 마이산 하나만으로 이유는 충분하다. 꼭 말의 해가 아니더라도 마이산은 겨울에 잘 어울리는 여행지다. 겨울에는 마이산의 기이한 형세가 가장 잘 보이고, 산 바다이야기pc버전다운 아래 돌탑의 신성한 기운도 더 강하게 느껴지니까.
게다가 진안의 대표 캐릭터는 빨간 망아지, 줄여서 ‘빠망’이다. 붉은 말의 해에 빨간 망아지라니…. 신년의 간지와 지역 캐릭터가 뜻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포개진다. 말이 마이산의 상징이라 망아지를 택한 건 알겠는데, 왜 하필 빨간색일까. 진안의 특산물 홍삼에서 색깔을 가져와서 그렇단다.
릴게임가입머니 진안에는 섬진강 발원지 데미샘도 있다. 모든 물줄기는 작은 샘 하나에서 시작한다. 데미샘을 비롯한 모든 시원(始原)은 첫 번째 시작을 생각하게 하는 법. 신년 벽두에 새삼 그 뜻을 되새긴다. 쉼 없이 500리를 달려 남해로 흘러가는 섬진강의 처음을 찾아간다.
신년 진안 여행의 행선지는 마이산과 데미샘이다. 두 장소 모두 그 앞에서 ‘잘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두 손을 모으게 하는 곳이다. 거기가 좋은 신년 여행지인 이유다.
# 마이산에서 ‘먹을 찍은 붓’을 보다
마이산은 진안의 ‘몸’이다. 진안에 다가서면 가장 먼저 마중 나오는 건 마이산이다. 진안을 지나가는 새만금∼포항 간 고속도로에서도, 전북 부안에서 대구로 가는 30번 국도에서도, 용담호를 가로질러 내려오는 795번 지방도로에서도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건 마이산이다.
겨울 마이산은 근사하다. 겨울에는 말 귀 모양으로 솟은 산의 형세가 유독 또렷하다. 마치 붓을 쿡 찍어서 먹(墨)의 농담으로 그려 낸 듯하다. 마이산은 여느 산과 느낌이 전혀 다르다.
기이한 산세는 신비스러운 느낌이다. 어쩐지 비장감도 한 큰술 넣어져 있는 것 같다. 마이산은 계절마다 느낌과 분위기가 다르다. 특히 치장과 색깔이 다 지워진 겨울 마이산은 무겁고 차다. 마치 ‘뼈대만 남은 정신’ 같다.
마이산의 형상은 말의 귀를 빼닮았다. 누가 봐도 그렇다. 의문은 ‘마이(馬耳·말 귀)’란 이름이 조선 태종 때 들어서야 처음 나온다는 것. 그렇다면 그 이전에 마이산에서 말 귀를 보지 못했다는 얘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신라 때 마이산은 서다산(西多山)이었고, 고려 때는 용출산(龍出山)이었다. 여름에는 용의 뿔처럼 보인다고 해서 용각봉이라고 했고, 겨울이면 좀처럼 눈이 쌓이지 않는 암봉이 먹물을 찍은 붓 같다고 해서 문필봉이라고도 했다. 겨울인 지금 가서 보면 정말 붓으로 보인다.
마이산 탑사를 마주 보고 있는 낡은 관광지 상가 ‘마이산휴게실회관’. 간판에서 회관의 ‘관’ 자가 떨어져 나갔다.
# 소망과 기도가 탑의 의미가 되다
마이산에서는 기운(氣運)이 느껴진다. 말 귀를 닮은 기이한 산세도 그렇고, 산 아래 벼랑의 절집 탑사 경내에 세워진 80여 기 돌탑도 범상찮다. 아슬아슬 절묘하게 쌓아 올린 탑사의 돌탑에서는 둔갑술과 축지법을 비롯한 도술이 등장하고, 탑 자리를 놓고는 제갈량의 팔진도법까지 들먹여진다. 호랑이를 몰고 다녔다거나 마이산을 명주실로 묶어 건너다녔다는 전설 같은 얘기도 있다.
굳이 진위를 따질 필요가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천지 음양의 이치를 적용해 팔진도법으로 쌓았다’는 돌탑과 관련한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이야기조차 근거가 전혀 없다. 돌탑에는 그런 원칙이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는 오로지 한 가지. ‘술법과 도술 이야기가 만들어질 만큼’ 돌탑이 신묘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탑사의 돌탑 중에는 천지탑과 약사탑, 월광탑, 일광탑처럼 제법 웅장한 원추형 석탑도 있다. 탑사의 돌탑을 대표하는 건 가장 뒤쪽에 있는 천지탑이다. 이름은 하나지만 천지탑은 양탑과 음탑, 2기로 이뤄졌다. 마주 보고 선 오른쪽이 양탑, 왼쪽이 음탑이다. 천지탑이 선 곳이 마이산에서 가장 기(氣)가 강한 자리란다.
그 앞에 손을 모으는 건 그걸 믿어서가 아니다. 실현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 앞에 모이는 소망과 기도만으로, 탑은 존재의 의미를 다하는 것이니까.
# 이갑용과 이춘삼은 같은 인물일까
여행자라면 ‘여기까지’로 충분하지만 궁금증을 따라서 더 멀리 가 보자. 마이산 탑사의 돌탑을 쌓은 건 ‘이갑용 처사’라고 다들 알고 있다. 둔갑술을 하고, 축지법을 쓴다는 신비한 존재로 그려지는 인물이다. 그는 누구일까. 탑사 앞에 세워진 두 기의 비석에 그를 설명하는 글이 있다.
1977년 8월에 세운 사적비(事積碑)가 그려 낸 이갑용은 다음과 같다. 전주 이씨. 임실 태생. 군졸이 됐다가 1년 만에 포도대장으로 발탁됐는데 직을 사임했다. 스물다섯 나이에 산신의 계시로 마이산에 들어 고행과 기도로 수도 생활을 하다 입산 1년 만에 깨달은 바 있어 만국 평화를 기원하는 일념으로 탑을 쌓는다. 95살 여름에 숨을 멈췄다가 34시간 만에 기적의 회생을 해 3년을 더 살고 98세로 세상을 떴다.
그 옆에 비석이 하나 더 있다. 사적비 이후 17년쯤 지난 뒤에 세워졌다. 이 비석에는 지역 출신 시인이 쓴 이갑용의 생애가 적혀 있다. 부모상을 치르고 3년 시묘살이를 한 뒤 어지러운 나라와 인생의 괴로움에 회의를 느끼고 명산을 찾아 수도했다. 난세와 억조창생을 구원하려면 공을 들여야 한다는 신의 계시와 깨달음으로 솔잎을 생식하며 이곳에 탑을 쌓았다. 천지 음양 이치와 팔진도법으로 1885년부터 30여 년에 걸쳐 탑을 쌓고 일생을 기도로 살다 1957년 9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두 개의 비석에 새겨진 일대기에는 좀처럼 믿기지 않는 내용이 적잖다. 군졸이 1년 만에 종이품의 무관직인 포도대장이 됐다는 건, 지금으로 치면 순경이 불과 1년 만에 시·도 경찰청장 급인 경무관이나 치안감쯤 됐다는 얘기다. 이게 될 법이나 한 이야기일까.
고종실록에 단서가 있다. 실록에는 1896년 12월 27일 재판소에 난입한 10여 명의 군졸 일당 얘기가 나오는데, 난입에 앞장선 주동자 이름이 ‘이춘삼(李春三)’이다. 그는 상관이 억울한 상황에 몰리자 목숨을 걸고 재판소에 난입했다. 이 사건으로 이춘삼은 포형(砲刑·총살형)이 논의되다 결국 종신 유배형에 처했다.
난데없이 군졸 이춘삼 얘기를 꺼낸 데는 이유가 있다. 마이산 탑을 쌓았다는 이갑용의 호적 이름이 다름 아닌 ‘이춘삼’이어서다. 여러 정황에 미뤄 보면 둘은 동일인으로 보인다는 게 향토학자들의 설명이다. 그가 유배지에서 탈출해 마이산으로 왔을 거란 얘기다.
데미샘이 있는 봉우리 천상데미를 오르는 등산객이 섬진강 발원지인 데미샘을 보고 있다.
# 한양을 겨눈 화살의 살기를 누르고자
이갑용이 탑사의 돌탑을 쌓았다는 건 3분의 2쯤은 맞고, 3분의 1쯤은 틀린 얘기다. 이갑용이 돌탑을 쌓은 건 틀림없지만 그가 쌓기 이전에 이미 탑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증거가 마이산 아래 살았던 담락당 하립이 펴낸 문집의 시에 나온다. 시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 속금산 속에 탑이 줄줄이 서 있는데(束金山裡 塔重重)…” 마이산의 옛 지명이 바로 속금산이다.
이갑용은 1860년에 나서 1957년에 죽었고, 이 시를 쓴 하립은 100년쯤 앞선 1769년에 나서 1831년에 세상을 떴다. 100년 전에 살았던 이가 탑을 봤으니 100년 뒤의 이갑용이 탑 쌓기를 ‘시작’했던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왜 여기에 처음 돌탑을 쌓기 시작했던 것일까.
앞서 말했듯이 조선 초 마이산은 ‘금(金)을 묶는다(束)’는 뜻의 속금산이었다. 자신의 성씨에 ‘목(木)’의 기운이 들어 있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목과는 상극인 ‘금’의 기운을 품은 마이산을 견제하고자 명명한 지명이었다. 풍수설을 신봉했던 새 왕조는 국토의 허(虛)와 흉(凶)을 땅 이름으로나마 막으려 했다.
비슷한 이야기가 또 있다. 예로부터 금강은 남에서 북으로 거꾸로 흐른다 해서 ‘역수지형(逆水地形)’의 불온한 기운을 품고 있다고 치부됐다. 조선 후기의 문신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금강은 활을 거꾸로 쥔 모양으로 반궁수(反弓水)가 되어 한양을 겨누고 있는 형국”이라고 썼다. 실제 지도를 보면 금강의 물길은 지금도 ‘서울을 마주 보는 활 모양’이다.
금강이 활이라면, 화살은 산이다. 계룡산, 대둔산, 운장산, 마이산을 한 줄로 이으면 직선이 된다. 직선의 화살이 겨누는 곳은 한양이다. 화살에서 가장 큰 위협은 화살촉. 날카로운 화살촉은 쇠붙이, 즉 ‘금(金)의 기운’이다. 그 기운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지목된 곳이 마이산이었을 것이다.
풍수가들은 지세의 결함을 보완하는 ‘비보(裨補)’를 행하면 땅의 기운을 누르고 위협을 없앨 수 있다고 믿었다. 마이산 탑사의 돌탑은 이런 연유로 왕조 차원의 비보 탑으로 처음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안(鎭安)이란 지명에 ‘진압할 진(鎭)’ 자를 쓴 것도 비슷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문헌도, 물증도 없으니 추정일 따름이지만….
# 겨울 마이산은 남부 주차장으로 가야
마이산 접근로는 남쪽과 북쪽 두 군데다. 남쪽에는 남부 주차장이 있고, 북쪽에는 북부 주차장이 있는데, 두 코스를 대개 주차장 이름으로 구분한다. 오래전에 마이산에 가서 탑사의 돌탑을 보고 온 기억이 있다면 십중팔구 들머리는 남부 주차장이었다. 남부 코스는 탑사로 가는 길이다. 이쪽을 택하면 길은 사당 이산묘를 지나고 절집 금당사와 저수지 탑영제를 지나 탑사로 이어진다. 2㎞ 남짓한 길이다.
이 길 위에는 오래된 유원지의 빛바랜 풍경이 남아 있다. 기념품을 파는 상점과 인절미며 꽈배기 등 군것질거리를 파는 가게, 도토리묵과 막걸리, 산채비빔밥을 파는 식당이 늘어서 있다. 어쩐지 쇠락한 분위기. 새로 문 연 말끔한 카페도 없지 않지만, 저수지에 떠 있는 오리배와 효자손과 기념품을 파는 휴게소는 오래전 여행이 ‘행락’이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레트로 풍경의 절정은 탑사를 코앞에서 마주 보고 있는 낡은 상가에 있다. 상가 간판의 마지막 글자 ‘관’이 떨어져 나가 ‘마이산 휴게실회’가 된 상가는 흑백사진 속 모습 같다. 간판에는 ‘코닥필름’과 ‘기념 타올’이란 글씨도 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는 여행명소마다 ‘기념 타올’이 있었다. 여행 한 번 다녀온 게 두고두고 자랑이 되던 시절 얘기다. 좀 쓸쓸한 듯도 하고, 한편으로는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이런 풍경은 겨울에 썩 잘 어울린다. 겨울 마이산을 보겠다면 저울질해 볼 것도 없이 남부 주차장 코스인 이유다.
북부 주차장에서 시작하는 마이산 코스도 나름의 장점이 있긴 하다. 우선 전체적인 마이산의 모습은 북쪽에서 더 잘 볼 수 있다. 늦게 정비된 북부 주차장 쪽에는 테마공원과 박물관, 산책로 등 다양한 관람 공간과 즐길 거리가 잘 갖춰져 있다. 북부 주차장에서 마이산 산행 들머리인 천왕문까지는 셔틀버스가 다닌다. 마이산 산행이 목적이라면 이쪽으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안전 문제 때문에 마이산 등산로가 전면 통제되는 겨울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마이산 아래 탑사의 돌탑. 원추형 탑과 한 줄 탑 80여 기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법당 뒤쪽의 원추형 탑이 마이산에서 지기(地氣)가 가장 센 자리에 쌓았다는 ‘천지탑’이다.
# 섬진강의 시작을 찾아가는 길
이제 섬진강 발원지로 간다. 진안에서 시작해 임실, 순창을 거쳐 남해의 광양만 앞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섬진강은 남한의 강 중에서 네 번째로 길다. 500리 여정 섬진강의 시작이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상추막이골에 있다. 섬진강 발원지 ‘데미샘’이다.
샘 이름으로 쓴 ‘데미’란 무슨 뜻일까. 데미는 ‘더미’에서 왔다. 데미샘이란 ‘돌더미 사이에서 솟는 샘’을 말한다. 데미샘 동쪽 봉우리를 ‘천상데미’라고 부른다. 무슨 무슨 ‘산(山)’이거나 무슨 무슨 ‘봉(峰)’이 아니다. 천상데미의 이름을 풀어 보면 ‘하늘로 올라가는(天上) 돌더미’다.
‘발원지’라면 자못 장엄하고 신령스러운 분위기를 떠올리기 쉬운데, 데미샘은 그런 느낌이 아니다. 새 물이 콸콸 솟아나는 한강 발원지 검룡소나 전설로 가득한 낙동강 발원지 황지(黃池)가 보여 주는 비장미와는 거리가 아주 멀다. 자그마한 정자 하나가 있고, 그 옆에 안내판이 있고, 물이 고인 작은 돌무더기 구덩이가 하나 있을 따름이다. 물이 맑은 것도, 수량이 많은 것도 아니다. 거기서 물이 솟는지 아닌지조차 잘 구분할 수 없을 정도다. 작고 볼품없는 시작이 허탈한 느낌마저 준다.
데미샘을 보러 올라가는 산길에서 샘을 보고 내려오던 이들과 여러 번 마주쳤다. 그들이 전해 준 데미샘의 감상은 한결같았다. “뭐 볼 게 있는 줄 알았더니….” 하지만 한편으로는 유장한 강의 행로와 볼품없는 물의 시작이 극적으로 대비되는 한 편의 우화(寓話)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데미샘에서의 실망을 위로해 주고 남았던 건 데미샘까지 오르는 숲길이었다. 산길 양쪽으로 신우대가 무성했다. 조릿대라고도 불리는 신우대는 겨울에도 풍성한 초록이다. 펜화로 쓱쓱 그려 낸 듯한 여윈 겨울나무 숲에서는 진하고 알싸한 박하 향이 풍기는 듯했다.
# 숨은 명소… 진안의 건축과 누각
데미샘 가는 길은 간명하다. 데미샘자연휴양림으로 입장해 섬진강 발원지 이정표를 보고 탐방로를 따라가면 된다. 다양한 숙소를 갖춘 숲속의 자연휴양림은 숙소 사정이 열악하기 짝이 없는 진안읍 숙소의 훌륭한 대안이다.
진안읍에서 데미샘까지 가는 길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진안의 명소가 여러 곳 있다. 데미샘 가는 길에 꼭 거치게 되는 마을이 있으니, 백운면 반송리 원반 마을이다. 400년 된 반송(盤松) 한 그루가 곧 지명이 된 마을이다. 마을에서 느껴지는 건 오래된 시간이다.
마을 천변에는 아름드리 왕버드나무와 함께 150여 년 내력의 정자 학남정과 개안정이 있고,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최양을 기리는 번듯한 유허비와 제각이 있다. 최양은 이성계를 도와 공을 세웠지만, 스승 정몽주가 세상을 뜨자 벼슬을 내놓고 낙향한 인물. 유허비 부근에 거금을 시주해 천변에 다리를 놓은 송경모의 공덕을 기리는 시주비도 있다. 눈에 확 뜨이는 볼거리가 있는 건 아니지만 마을 분위기가 푸근하고 정겹다.
진안에는 독특한 지형을 활용해 지은 근사한 누각과 정자가 여럿 있어서 구경하기 좋다. 대표적인 곳이 마령면 강정리의 수선루다. 수선루는 바위 동굴에 끼워 넣듯 지은 누각 형식의 정자. 400여 년 전쯤 송씨 집안의 4형제가 세우고 돈독한 우애를 자랑하며 드나들었다는데, 절묘하게 바위 사이로 집어넣은 건축이 눈길을 붙잡는다.
진안의 누각과 정자를 두루 보고 싶다면 먼저 수선루를 겨눠 찾아간 후에 거기서부터 데미샘으로 방향을 잡으면 된다. 수선루에서 데미샘으로 가는 길 위에 쌍계정과 쌍벽루, 삼계석문과 만취정 등이 있다. 꼭 들러 봐야 할 곳을 꼽자면 바위가 입을 열어 정자를 물고 있는 형상의 쌍계정, 시루봉이란 언덕 위에 올려 지은 누각 쌍벽루, 일제강점기에 명당 중의 명당에 2층으로 지은 강정리전영표가옥, 그리고 그 곁의 영계서원, 완월루 등이다.
■ 고원시장 청년몰 맛집
진안은 ‘손바닥만 한’ 소읍이지만 이런저런 소소한 맛집이 제법 있다. 진안 고원시장 2층 청년몰의 ‘마이퍼타임’은 한국으로 시집온 베트남 이주 여성의 친정어머니가 주방을 맡아 ‘진짜 베트남 음식’을 차려 내는 식당이다. 퍼따이(소고기 쌀국수)와 분팃느엉(비빔 쌀국수)이 주메뉴. 주말에는 전북음식문화대전에서 우수상을 받은 ‘반미보코’를 특별 메뉴로 낸다. 곁들여 내는 바게트 빵을 고기 스튜에 찍어 먹는 음식이다.
박경일 기자
진안=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2026년은 병오년이다. 병오(丙午)는 ‘갑을병정…’ 하는 천간(天干·하늘의 기운)과 ‘자축인묘…’하는 지지(地支·땅의 작용)를 순서대로 조합한 60갑자 중 하나다. 천간에서 병(丙)은 ‘오행(五行)에서 불(火)’의 성질을 릴게임온라인 가졌다. 지지의 오(午)는 말인데, 말 역시 불의 기운을 품었다. 병오년에서 병도, 오도 다 불이란 얘기다. 불의 상징색은 붉은색.병오년, 올해를 ‘붉은 말의 해’라 부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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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역동적이다. 붉은색도 열정 릴게임5만 과 생명을 상징하는 색이다. 붉은 말의 해인 병오년에서 떠올려지는 건 ‘거침없이 질주하는 뜨거운 생명력’이다. 그 기운에 딱 맞는 신년 여행지가 있다. 마이산(馬耳山)이 있는 전북 진안이다. 말 귀 형상의 마이산 하나만으로 이유는 충분하다. 꼭 말의 해가 아니더라도 마이산은 겨울에 잘 어울리는 여행지다. 겨울에는 마이산의 기이한 형세가 가장 잘 보이고, 산 바다이야기pc버전다운 아래 돌탑의 신성한 기운도 더 강하게 느껴지니까.
게다가 진안의 대표 캐릭터는 빨간 망아지, 줄여서 ‘빠망’이다. 붉은 말의 해에 빨간 망아지라니…. 신년의 간지와 지역 캐릭터가 뜻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포개진다. 말이 마이산의 상징이라 망아지를 택한 건 알겠는데, 왜 하필 빨간색일까. 진안의 특산물 홍삼에서 색깔을 가져와서 그렇단다.
릴게임가입머니 진안에는 섬진강 발원지 데미샘도 있다. 모든 물줄기는 작은 샘 하나에서 시작한다. 데미샘을 비롯한 모든 시원(始原)은 첫 번째 시작을 생각하게 하는 법. 신년 벽두에 새삼 그 뜻을 되새긴다. 쉼 없이 500리를 달려 남해로 흘러가는 섬진강의 처음을 찾아간다.
신년 진안 여행의 행선지는 마이산과 데미샘이다. 두 장소 모두 그 앞에서 ‘잘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두 손을 모으게 하는 곳이다. 거기가 좋은 신년 여행지인 이유다.
# 마이산에서 ‘먹을 찍은 붓’을 보다
마이산은 진안의 ‘몸’이다. 진안에 다가서면 가장 먼저 마중 나오는 건 마이산이다. 진안을 지나가는 새만금∼포항 간 고속도로에서도, 전북 부안에서 대구로 가는 30번 국도에서도, 용담호를 가로질러 내려오는 795번 지방도로에서도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건 마이산이다.
겨울 마이산은 근사하다. 겨울에는 말 귀 모양으로 솟은 산의 형세가 유독 또렷하다. 마치 붓을 쿡 찍어서 먹(墨)의 농담으로 그려 낸 듯하다. 마이산은 여느 산과 느낌이 전혀 다르다.
기이한 산세는 신비스러운 느낌이다. 어쩐지 비장감도 한 큰술 넣어져 있는 것 같다. 마이산은 계절마다 느낌과 분위기가 다르다. 특히 치장과 색깔이 다 지워진 겨울 마이산은 무겁고 차다. 마치 ‘뼈대만 남은 정신’ 같다.
마이산의 형상은 말의 귀를 빼닮았다. 누가 봐도 그렇다. 의문은 ‘마이(馬耳·말 귀)’란 이름이 조선 태종 때 들어서야 처음 나온다는 것. 그렇다면 그 이전에 마이산에서 말 귀를 보지 못했다는 얘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신라 때 마이산은 서다산(西多山)이었고, 고려 때는 용출산(龍出山)이었다. 여름에는 용의 뿔처럼 보인다고 해서 용각봉이라고 했고, 겨울이면 좀처럼 눈이 쌓이지 않는 암봉이 먹물을 찍은 붓 같다고 해서 문필봉이라고도 했다. 겨울인 지금 가서 보면 정말 붓으로 보인다.
마이산 탑사를 마주 보고 있는 낡은 관광지 상가 ‘마이산휴게실회관’. 간판에서 회관의 ‘관’ 자가 떨어져 나갔다.
# 소망과 기도가 탑의 의미가 되다
마이산에서는 기운(氣運)이 느껴진다. 말 귀를 닮은 기이한 산세도 그렇고, 산 아래 벼랑의 절집 탑사 경내에 세워진 80여 기 돌탑도 범상찮다. 아슬아슬 절묘하게 쌓아 올린 탑사의 돌탑에서는 둔갑술과 축지법을 비롯한 도술이 등장하고, 탑 자리를 놓고는 제갈량의 팔진도법까지 들먹여진다. 호랑이를 몰고 다녔다거나 마이산을 명주실로 묶어 건너다녔다는 전설 같은 얘기도 있다.
굳이 진위를 따질 필요가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천지 음양의 이치를 적용해 팔진도법으로 쌓았다’는 돌탑과 관련한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이야기조차 근거가 전혀 없다. 돌탑에는 그런 원칙이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는 오로지 한 가지. ‘술법과 도술 이야기가 만들어질 만큼’ 돌탑이 신묘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탑사의 돌탑 중에는 천지탑과 약사탑, 월광탑, 일광탑처럼 제법 웅장한 원추형 석탑도 있다. 탑사의 돌탑을 대표하는 건 가장 뒤쪽에 있는 천지탑이다. 이름은 하나지만 천지탑은 양탑과 음탑, 2기로 이뤄졌다. 마주 보고 선 오른쪽이 양탑, 왼쪽이 음탑이다. 천지탑이 선 곳이 마이산에서 가장 기(氣)가 강한 자리란다.
그 앞에 손을 모으는 건 그걸 믿어서가 아니다. 실현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 앞에 모이는 소망과 기도만으로, 탑은 존재의 의미를 다하는 것이니까.
# 이갑용과 이춘삼은 같은 인물일까
여행자라면 ‘여기까지’로 충분하지만 궁금증을 따라서 더 멀리 가 보자. 마이산 탑사의 돌탑을 쌓은 건 ‘이갑용 처사’라고 다들 알고 있다. 둔갑술을 하고, 축지법을 쓴다는 신비한 존재로 그려지는 인물이다. 그는 누구일까. 탑사 앞에 세워진 두 기의 비석에 그를 설명하는 글이 있다.
1977년 8월에 세운 사적비(事積碑)가 그려 낸 이갑용은 다음과 같다. 전주 이씨. 임실 태생. 군졸이 됐다가 1년 만에 포도대장으로 발탁됐는데 직을 사임했다. 스물다섯 나이에 산신의 계시로 마이산에 들어 고행과 기도로 수도 생활을 하다 입산 1년 만에 깨달은 바 있어 만국 평화를 기원하는 일념으로 탑을 쌓는다. 95살 여름에 숨을 멈췄다가 34시간 만에 기적의 회생을 해 3년을 더 살고 98세로 세상을 떴다.
그 옆에 비석이 하나 더 있다. 사적비 이후 17년쯤 지난 뒤에 세워졌다. 이 비석에는 지역 출신 시인이 쓴 이갑용의 생애가 적혀 있다. 부모상을 치르고 3년 시묘살이를 한 뒤 어지러운 나라와 인생의 괴로움에 회의를 느끼고 명산을 찾아 수도했다. 난세와 억조창생을 구원하려면 공을 들여야 한다는 신의 계시와 깨달음으로 솔잎을 생식하며 이곳에 탑을 쌓았다. 천지 음양 이치와 팔진도법으로 1885년부터 30여 년에 걸쳐 탑을 쌓고 일생을 기도로 살다 1957년 9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두 개의 비석에 새겨진 일대기에는 좀처럼 믿기지 않는 내용이 적잖다. 군졸이 1년 만에 종이품의 무관직인 포도대장이 됐다는 건, 지금으로 치면 순경이 불과 1년 만에 시·도 경찰청장 급인 경무관이나 치안감쯤 됐다는 얘기다. 이게 될 법이나 한 이야기일까.
고종실록에 단서가 있다. 실록에는 1896년 12월 27일 재판소에 난입한 10여 명의 군졸 일당 얘기가 나오는데, 난입에 앞장선 주동자 이름이 ‘이춘삼(李春三)’이다. 그는 상관이 억울한 상황에 몰리자 목숨을 걸고 재판소에 난입했다. 이 사건으로 이춘삼은 포형(砲刑·총살형)이 논의되다 결국 종신 유배형에 처했다.
난데없이 군졸 이춘삼 얘기를 꺼낸 데는 이유가 있다. 마이산 탑을 쌓았다는 이갑용의 호적 이름이 다름 아닌 ‘이춘삼’이어서다. 여러 정황에 미뤄 보면 둘은 동일인으로 보인다는 게 향토학자들의 설명이다. 그가 유배지에서 탈출해 마이산으로 왔을 거란 얘기다.
데미샘이 있는 봉우리 천상데미를 오르는 등산객이 섬진강 발원지인 데미샘을 보고 있다.
# 한양을 겨눈 화살의 살기를 누르고자
이갑용이 탑사의 돌탑을 쌓았다는 건 3분의 2쯤은 맞고, 3분의 1쯤은 틀린 얘기다. 이갑용이 돌탑을 쌓은 건 틀림없지만 그가 쌓기 이전에 이미 탑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증거가 마이산 아래 살았던 담락당 하립이 펴낸 문집의 시에 나온다. 시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 속금산 속에 탑이 줄줄이 서 있는데(束金山裡 塔重重)…” 마이산의 옛 지명이 바로 속금산이다.
이갑용은 1860년에 나서 1957년에 죽었고, 이 시를 쓴 하립은 100년쯤 앞선 1769년에 나서 1831년에 세상을 떴다. 100년 전에 살았던 이가 탑을 봤으니 100년 뒤의 이갑용이 탑 쌓기를 ‘시작’했던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왜 여기에 처음 돌탑을 쌓기 시작했던 것일까.
앞서 말했듯이 조선 초 마이산은 ‘금(金)을 묶는다(束)’는 뜻의 속금산이었다. 자신의 성씨에 ‘목(木)’의 기운이 들어 있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목과는 상극인 ‘금’의 기운을 품은 마이산을 견제하고자 명명한 지명이었다. 풍수설을 신봉했던 새 왕조는 국토의 허(虛)와 흉(凶)을 땅 이름으로나마 막으려 했다.
비슷한 이야기가 또 있다. 예로부터 금강은 남에서 북으로 거꾸로 흐른다 해서 ‘역수지형(逆水地形)’의 불온한 기운을 품고 있다고 치부됐다. 조선 후기의 문신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금강은 활을 거꾸로 쥔 모양으로 반궁수(反弓水)가 되어 한양을 겨누고 있는 형국”이라고 썼다. 실제 지도를 보면 금강의 물길은 지금도 ‘서울을 마주 보는 활 모양’이다.
금강이 활이라면, 화살은 산이다. 계룡산, 대둔산, 운장산, 마이산을 한 줄로 이으면 직선이 된다. 직선의 화살이 겨누는 곳은 한양이다. 화살에서 가장 큰 위협은 화살촉. 날카로운 화살촉은 쇠붙이, 즉 ‘금(金)의 기운’이다. 그 기운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지목된 곳이 마이산이었을 것이다.
풍수가들은 지세의 결함을 보완하는 ‘비보(裨補)’를 행하면 땅의 기운을 누르고 위협을 없앨 수 있다고 믿었다. 마이산 탑사의 돌탑은 이런 연유로 왕조 차원의 비보 탑으로 처음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안(鎭安)이란 지명에 ‘진압할 진(鎭)’ 자를 쓴 것도 비슷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문헌도, 물증도 없으니 추정일 따름이지만….
# 겨울 마이산은 남부 주차장으로 가야
마이산 접근로는 남쪽과 북쪽 두 군데다. 남쪽에는 남부 주차장이 있고, 북쪽에는 북부 주차장이 있는데, 두 코스를 대개 주차장 이름으로 구분한다. 오래전에 마이산에 가서 탑사의 돌탑을 보고 온 기억이 있다면 십중팔구 들머리는 남부 주차장이었다. 남부 코스는 탑사로 가는 길이다. 이쪽을 택하면 길은 사당 이산묘를 지나고 절집 금당사와 저수지 탑영제를 지나 탑사로 이어진다. 2㎞ 남짓한 길이다.
이 길 위에는 오래된 유원지의 빛바랜 풍경이 남아 있다. 기념품을 파는 상점과 인절미며 꽈배기 등 군것질거리를 파는 가게, 도토리묵과 막걸리, 산채비빔밥을 파는 식당이 늘어서 있다. 어쩐지 쇠락한 분위기. 새로 문 연 말끔한 카페도 없지 않지만, 저수지에 떠 있는 오리배와 효자손과 기념품을 파는 휴게소는 오래전 여행이 ‘행락’이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레트로 풍경의 절정은 탑사를 코앞에서 마주 보고 있는 낡은 상가에 있다. 상가 간판의 마지막 글자 ‘관’이 떨어져 나가 ‘마이산 휴게실회’가 된 상가는 흑백사진 속 모습 같다. 간판에는 ‘코닥필름’과 ‘기념 타올’이란 글씨도 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는 여행명소마다 ‘기념 타올’이 있었다. 여행 한 번 다녀온 게 두고두고 자랑이 되던 시절 얘기다. 좀 쓸쓸한 듯도 하고, 한편으로는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이런 풍경은 겨울에 썩 잘 어울린다. 겨울 마이산을 보겠다면 저울질해 볼 것도 없이 남부 주차장 코스인 이유다.
북부 주차장에서 시작하는 마이산 코스도 나름의 장점이 있긴 하다. 우선 전체적인 마이산의 모습은 북쪽에서 더 잘 볼 수 있다. 늦게 정비된 북부 주차장 쪽에는 테마공원과 박물관, 산책로 등 다양한 관람 공간과 즐길 거리가 잘 갖춰져 있다. 북부 주차장에서 마이산 산행 들머리인 천왕문까지는 셔틀버스가 다닌다. 마이산 산행이 목적이라면 이쪽으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안전 문제 때문에 마이산 등산로가 전면 통제되는 겨울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마이산 아래 탑사의 돌탑. 원추형 탑과 한 줄 탑 80여 기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법당 뒤쪽의 원추형 탑이 마이산에서 지기(地氣)가 가장 센 자리에 쌓았다는 ‘천지탑’이다.
# 섬진강의 시작을 찾아가는 길
이제 섬진강 발원지로 간다. 진안에서 시작해 임실, 순창을 거쳐 남해의 광양만 앞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섬진강은 남한의 강 중에서 네 번째로 길다. 500리 여정 섬진강의 시작이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상추막이골에 있다. 섬진강 발원지 ‘데미샘’이다.
샘 이름으로 쓴 ‘데미’란 무슨 뜻일까. 데미는 ‘더미’에서 왔다. 데미샘이란 ‘돌더미 사이에서 솟는 샘’을 말한다. 데미샘 동쪽 봉우리를 ‘천상데미’라고 부른다. 무슨 무슨 ‘산(山)’이거나 무슨 무슨 ‘봉(峰)’이 아니다. 천상데미의 이름을 풀어 보면 ‘하늘로 올라가는(天上) 돌더미’다.
‘발원지’라면 자못 장엄하고 신령스러운 분위기를 떠올리기 쉬운데, 데미샘은 그런 느낌이 아니다. 새 물이 콸콸 솟아나는 한강 발원지 검룡소나 전설로 가득한 낙동강 발원지 황지(黃池)가 보여 주는 비장미와는 거리가 아주 멀다. 자그마한 정자 하나가 있고, 그 옆에 안내판이 있고, 물이 고인 작은 돌무더기 구덩이가 하나 있을 따름이다. 물이 맑은 것도, 수량이 많은 것도 아니다. 거기서 물이 솟는지 아닌지조차 잘 구분할 수 없을 정도다. 작고 볼품없는 시작이 허탈한 느낌마저 준다.
데미샘을 보러 올라가는 산길에서 샘을 보고 내려오던 이들과 여러 번 마주쳤다. 그들이 전해 준 데미샘의 감상은 한결같았다. “뭐 볼 게 있는 줄 알았더니….” 하지만 한편으로는 유장한 강의 행로와 볼품없는 물의 시작이 극적으로 대비되는 한 편의 우화(寓話)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데미샘에서의 실망을 위로해 주고 남았던 건 데미샘까지 오르는 숲길이었다. 산길 양쪽으로 신우대가 무성했다. 조릿대라고도 불리는 신우대는 겨울에도 풍성한 초록이다. 펜화로 쓱쓱 그려 낸 듯한 여윈 겨울나무 숲에서는 진하고 알싸한 박하 향이 풍기는 듯했다.
# 숨은 명소… 진안의 건축과 누각
데미샘 가는 길은 간명하다. 데미샘자연휴양림으로 입장해 섬진강 발원지 이정표를 보고 탐방로를 따라가면 된다. 다양한 숙소를 갖춘 숲속의 자연휴양림은 숙소 사정이 열악하기 짝이 없는 진안읍 숙소의 훌륭한 대안이다.
진안읍에서 데미샘까지 가는 길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진안의 명소가 여러 곳 있다. 데미샘 가는 길에 꼭 거치게 되는 마을이 있으니, 백운면 반송리 원반 마을이다. 400년 된 반송(盤松) 한 그루가 곧 지명이 된 마을이다. 마을에서 느껴지는 건 오래된 시간이다.
마을 천변에는 아름드리 왕버드나무와 함께 150여 년 내력의 정자 학남정과 개안정이 있고,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최양을 기리는 번듯한 유허비와 제각이 있다. 최양은 이성계를 도와 공을 세웠지만, 스승 정몽주가 세상을 뜨자 벼슬을 내놓고 낙향한 인물. 유허비 부근에 거금을 시주해 천변에 다리를 놓은 송경모의 공덕을 기리는 시주비도 있다. 눈에 확 뜨이는 볼거리가 있는 건 아니지만 마을 분위기가 푸근하고 정겹다.
진안에는 독특한 지형을 활용해 지은 근사한 누각과 정자가 여럿 있어서 구경하기 좋다. 대표적인 곳이 마령면 강정리의 수선루다. 수선루는 바위 동굴에 끼워 넣듯 지은 누각 형식의 정자. 400여 년 전쯤 송씨 집안의 4형제가 세우고 돈독한 우애를 자랑하며 드나들었다는데, 절묘하게 바위 사이로 집어넣은 건축이 눈길을 붙잡는다.
진안의 누각과 정자를 두루 보고 싶다면 먼저 수선루를 겨눠 찾아간 후에 거기서부터 데미샘으로 방향을 잡으면 된다. 수선루에서 데미샘으로 가는 길 위에 쌍계정과 쌍벽루, 삼계석문과 만취정 등이 있다. 꼭 들러 봐야 할 곳을 꼽자면 바위가 입을 열어 정자를 물고 있는 형상의 쌍계정, 시루봉이란 언덕 위에 올려 지은 누각 쌍벽루, 일제강점기에 명당 중의 명당에 2층으로 지은 강정리전영표가옥, 그리고 그 곁의 영계서원, 완월루 등이다.
■ 고원시장 청년몰 맛집
진안은 ‘손바닥만 한’ 소읍이지만 이런저런 소소한 맛집이 제법 있다. 진안 고원시장 2층 청년몰의 ‘마이퍼타임’은 한국으로 시집온 베트남 이주 여성의 친정어머니가 주방을 맡아 ‘진짜 베트남 음식’을 차려 내는 식당이다. 퍼따이(소고기 쌀국수)와 분팃느엉(비빔 쌀국수)이 주메뉴. 주말에는 전북음식문화대전에서 우수상을 받은 ‘반미보코’를 특별 메뉴로 낸다. 곁들여 내는 바게트 빵을 고기 스튜에 찍어 먹는 음식이다.
박경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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