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전기차 시장의 지형이 달라지고 있다. 고가의 중대형 전기차가 주류였던 흐름에서 벗어나, 유럽을 중심으로 도심형·보급형 소형 전기차 확산을 위한 규제 완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국내 완성차 업계도 소형 전기차 라인업 확대 등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12일 자동차업계에 따르면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12월 10일 ‘보급형 소형 전기차’ 규격을 새로 마련할 예정이다. 모든 승용차에 일괄 적용되던 안전·기술 기준을 소형 전기차에 한해 완화해, 제조원가를 낮출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EU 관계자는 “과도한 규제로 생산비가 높았던 소형차의 진입 장벽을 낮 춰, 유럽산 전기차의 가격 경쟁력을 회복하겠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EU의 정책 변화는 중국산 전기차 공세에 대한 대응 성격이 짙다. 유럽 자동차 산업을 지키기 위한 방어전략인 셈이다. 올해 상반기 유럽에서 판매된 중국산 전기차는 약 34만 대로, 전년 대비 91% 급증했다. 시장 점유율도 2.7%에서 5.1%로 두 배 가까이 뛰었다.
EU가 지난해 10월 중국산 전기차에 최대 45.3%의 관세를 부과하며 견제에 나섰지만, 비야디(BYD) 등 중국 완성차업체들은 낮은 원가와 대량 공급력을 앞세워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 일부 업체는 유럽 현지 생산 거점까지 확보했다. BYD는 헝가리에 완성차 공장을 착공해 2026년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체리(Chery)는 스페 인 바르셀로나 인근에 조립공장을 구축 중이다.



폭스바겐코리아가 공개한 엔트리급 순수 전기차 'ID. EVERY1 콘셉트'. 사진 폭스바겐코리아


EU와 보조를 맞춰 유럽 완성차 업체들도 대응에 속도를 내고 있다. 독일 폭스바겐그룹은 최근 열린 뮌헨 모터쇼(IAA 모빌리티)에서 약 2만5000유로(약 3600만원) 수준의 소형 전기차 4종을 공개하며 본격적인 보급형 전기차(EV)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폭스바겐은 이보다 더 저렴한 도심형 전기차도 내부적으로 검토 중이다. 르노는 ‘트윙고’ 후속 초소형 전기차를 준비 중이며, 스텔란티스(피아트·푸조 등)는 경량 전기차 플랫폼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국내 완성차 업체들도 변화에 대응하고 있다. 현대차는 유럽 현지에서 판매 중인 ‘코나 EV’를 앞세워 입지를 넓히고 있으며, 기아는 올해 상반기 출시한 ‘EV3’에 이어 엔트리급 전기차 ‘EV2’와 ‘EV1’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현대차·기아는 EU가 추진 중인 1만5000~2만 유로(약 2500만~3330만원)대 보급형 전기차 규격에 정확히 부합하는 모델이 아직 없다. 하지만 기아의 차세대 소형 EV1이 유럽 전략차종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EV1은 기아 전기차 모델 가운데 가장 작은 버전으로 해치백 모델로 출시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말 유럽에 출시한 기아의 EV3가 올해 들어 5만5514대가 판매됐다. 사진 기아


전문가들은 EU의 정책 변화가 단순히 차 크기를 줄이는 수준을 넘어 전기차 산업의 질적 전환을 예고한다고 본다. 초기 전기차 경쟁이 환경 규제 대응과 기술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가격 경쟁력, 공급망 재편, 각국의 이해관계로 까지 전선이 확대됐다는 것이다. 특히 경기 둔화와 소비 위축이 겹치며 고가 전기차에 대한 수요가 줄고, 실속형·보급형 EV가 시장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분위기다.
조철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이번 규제 완화는 유럽 전체 전기차 보급 확대에 직접적인 도움이 될 것”이라며 “유럽 완성차업체들로서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대의 전기차를 보다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영우 기자 november@joongang.co.kr 기자 admin@no1reelsi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