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장을 걸어 둔 운치 있는 차실.


중국에서 생산되는 차의 종류는 '일평생 동안 다른 차를 매일 바꿔 마셔도 다 시음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다양하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차 중에서 중국 10대 명차에 선발된 보이차普洱茶는 중국 윈난성雲南省에서만 생산된다. 중국은 2009년 6월 1일부터 '보이차 지리 표시 상품 보호 관리법'을 적용해 "윈난성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만든 차는 '보이차'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다"는 배타적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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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찻물이 뿜어내는 고수차의 매력.


중국 정부는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문화 가운데 오늘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중국 전통문화 베스트 5'로 보이차를 선정했다. 이를 계기로 지난 2015년 중국 관영 CCTV는 중국 국사國師(나라의 스승), 쉬지아루가 총 릴게임종류 지휘하는 대형인문 다큐멘터리, '천사보이天賜普洱(하늘이 내려준 선물 보이차)'를 방영했다. CCTV PD 류춘위劉春雨는 필자에게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윈난 현지 촬영에 출연해 줄 것을 제안했다. 필자는 지난 2013년 1년여에 걸친 일정 조율 끝에 '천사보이' 촬영팀과 합류하러 윈난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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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을 적당히 가려주는 운무는 고품질의 차 생산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조건이다.


남한의 4.5배, 보이차의 고향 윈난
중국 서남단에 있는 윈난은 동남아 국가로 이어지는 교통요충지다. 남한의 4.5배 면적을 가진 윈난은 4,000km가 넘는 긴 바다이야기사이트 국경선을 갖고 있다. 서쪽은 미얀마, 남쪽은 베트남과 라오스에 접해 있다. 윈난 동쪽에는 광시좡족廣西壯族자치구와 구이저우성貴州省이 있으며, 시장西藏자치구와 쓰촨성四川省이 북쪽에 있다.



해발 1,900m에 위치한 쿤밍 창수이국제공항은 동남아시아로 연결되는 허브 공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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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해발 2,000m를 웃도는 윈난은 산악지대 84%와 구릉 지역과 계곡이 11%에 달하며 평평한 분지는 5%에 불과하다. 아열대 기후에 속하는 북위 21~29도에 걸쳐 있는 윈난은 고산지대가 많아 열대우림기후부터 만년설까지 동시에 공존하는 저위도 고산지대 기후 특징을 갖고 있다. 연교차보다는 일교차가 훨씬 큰 윈난은 한 지역에서 하루 4계절을 모두 느낄 수 있다.



보이차는 중국 윈난성에서만 생산된다.


'천사보이' 제작팀과 합류하기 이틀 전 18시 30분 인천국제공항을 이륙한 대한항공 KE885편은 4시간 35분 만에 윈난성 쿤밍昆明 창수이長水국제공항에 착륙했다. 해발 1,900m에 위치한 쿤밍은 1년 내내 온화한 기후로 '봄의 도시'라는 별칭이 있다. 심야에 도착한 쿤밍에서 하룻밤을 보낸 필자는 다음날 이른 아침 중국 국내선 항공편을 이용해 쿤밍 서남 방향으로 780km를 날아가 징홍景洪에 도착했다. 징홍은 타이傣족 자치주 시솽반나西雙版納의 주도州都로서 보이차 주요 산지의 길목이다.



징홍의 대금탑 높이는 66.6m로 '하나의 강이 여섯 나라를 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금탑 뒤로 펼쳐지는 야시장은 규모와 인파로 유명하다.


해발 38m에 불과한 징홍은 전형적인 아열대 기후로 고온다습하다. 적군의 공습을 방어하기 위해 은밀한 지형에 세워졌던 공군기지를 개조한 징홍의 가사嘎洒공항은 조종사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공항이다. 급강하와 급상승을 번갈아 해야만 착륙할 수 있는 활주로 위치와 짧은 활주로 때문에 조종사들 사이에 악명이 높다. CCTV 제작진이 준비해 준 승용차를 타고 3시간 만에 촬영 현장 징마이산景邁山에 도착했다. 때마침 비가 내렸다. SNS와 화상통화로 얼굴을 이미 익힌 CCTV PD 류춘위가 반갑게 맞이했다. KBS가 제작한 '차마고도茶馬古道'에 스태프로 참여한 경험이 있는 류PD와 우중 촬영을 강행하기로 했다.



해발 5,596m인 윈난의 옥룡설산.


전쟁 대신 평화를 찾아 첩첩산중으로
궂은비 속에 진행된 촬영 첫 일정은 윈난에서 최초로 차나무를 재배한 부랑布朗족 두령으로 사후에 차조신茶祖神으로 모셔진 '파아이렁帕噯冷'을 모신 사당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사당은 사륜구동 SUV로 1시간 남짓 산속으로 길을 달리면 부랑족이 모여 사는 망징산芒景山 망홍芒洪촌에 있었다.



파아이렁이 부랑족을 이끌고 정착하는 과정을 글과 그림으로 묘사한 벽화.


1,800여 년 전 윈난을 지배하던 남조국南詔國의 요청으로 파아이렁은 부랑족을 용병으로 이끌며 숱한 전투에서 승리했다. 실익 없는 전쟁보다 평화를 추구하던 파아이렁은 잦은 용병 차출과 외족 침입을 피해 험준한 산악지대로 들어가 새로운 생활 터전을 찾아 나섰다. 교통이 편리하고 농산물과 물자가 풍족한 호반湖畔 지역을 버리고 생존환경이 열악한 산악지대로 이동하면서 풍토병에 시달리는 사람이 속출했다. 우연히 발견한 차나무 잎으로 환자들이 치유되는 것을 알게 된 파아이렁은 야생 차나무가 서식하는 징마이산에 정착했다.



자주색으로 나오는 아포.


징마이산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타이족 왕과 분쟁이 발생했다. 전쟁 대신 평화를 선택한 파아이렁은 타이족 왕의 화번공주和蕃公主를 아내로 맞이하며 갈등을 종식시켰다. 타이족 왕은 파帕라는 관직을 파아이렁에게 내려 부랑족에 대한 통치를 일임했다. 파아이렁은 '파'라는 관직에 '아이렁'이라는 이름이 더해진 존칭이다.
"금은보화 물려주면 궁핍해져"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1주년 기념식이 열린 베이징 천안문에서 마오쩌둥이 소수민족을 환영하는 모습.


파아이렁은 대본영大本營을 전망 좋은 산등성이에 자리한 웡지翁基에 두고 주변 산채山寨를 관리했다. 웡지를 중심으로 파아이렁은 산허리를 개간해 차를 재배하며 부랑족 마을을 넓혀갔다. 말년에 접어든 파아이렁은 모계사회를 따르는 부랑족 전통에 따라 7공주에게 차산을 골고루 나눠주며 유훈을 남겼다.
오늘날까지도 노래로 전해지는 후대를 위한 유언은 "소와 말과 같은 가축은 재난과 질병이 발생하면 몰살해 버린다. 금은보화를 물려주면 낭비하다가 궁핍해질까 염려된다. 생명력이 강한 차나무는 절대로 소멸되지 않으니 차나무를 소중히 키우면 결코 가난하게 살지 않을 것이다"였다.
시야를 가리는 비의 장막을 뚫고 더 깊은 산속으로 올라가니 파아이렁사를 알리는 패루牌樓가 나타났다. 파아이렁의 후예인 현재 부랑족 족장, 수궈원蘇國文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궈원은 향불을 피워 사당 안에 모셔진 부랑족 차조신 파아이렁과 나란히 서있는 타이족 왕비 동상에 먼저 예를 표하고 파아이렁사를 안내했다. 수궈원이 사당과 박물관 곳곳을 필자에게 보여 주며 담화를 나누는 모습을 CCTV 제작진이 카메라로 기록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를 재구성해 보았다.



차조신에게 예를 올리는 부족장.


마오쩌둥에게 선물한 보이차
수궈원의 아버지 수리야蘇利亞는 1950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설립 1주년 기념식이 열린 베이징北京 천안문에서 소수민족 부랑족을 대표해 자신이 만든 보이차를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에게 선물로 증정했다. 저우언라이 총리를 비롯한 건국지도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런데 당시 마오쩌둥을 대면하러 가는 수리야의 발길은 마냥 가볍지만 않았다. 신중국은 태어났으나 중앙 정부의 장악력이 미약한 윈난은 국민당 잔여세력과 연합한 지역 민족 군이 국경 지대를 기반으로 반정부 활동을 하고 있었다.
부랑족이 거주하는 망징산과 징마이산처럼 변경의 깊은 산속은 반정부 세력의 온상과 다름없던 시절이었다. 수리야의 친정부 행보는 자신과 가족의 생명뿐만 아니라 부랑족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던 시대였다. 그는 베이징으로 떠나는 날까지도 밤잠을 설치며 고민했다. 어쩌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다섯 살배기 아들, 수궈원을 안아줬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등을 돌려 베이징으로 가는 그의 손에는 차혼茶魂을 담은 보이차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철부지 수궈원의 눈에 아버지의 결연한 뒷모습이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차혼은 야생 고차수古茶樹에서 채취한 아포차芽苞茶의 한 종류로서 봄의 전령사 역할을 한다. 고산지대의 겨울을 견딘 차나무에서 새싹이 움트면 잎으로 펼쳐지기 전에 어린 봉오리를 하나하나 손으로 채취해 극히 소량만 만들 수 있는 희귀한 차다. 가공방법에 따라 녹차와 백차 그리고 보이차로 제다製茶된다. 돌연변이로 녹색이 아닌 자주색으로 나오는 아포만 모아 만든 차는 희소성 때문에 고가에 판매된다. 참새 주둥이를 닮아 '소작첨취차小雀尖嘴茶'라고도 하는 차혼은 족장이 관리하며 조상을 위한 차례에 사용되는 신물神物이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차혼'이란 이름의 차는 위 내용을 앞세운 상표일 뿐 실제 내용물은 천차만별이다.



필자와 부랑족 족장인 수궈원.


세계최대 고차수 단지 망징산과 징마이산
초등학교 교사 출신인 수궈원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랑족 족장이 됐다. 변경 지역의 족장 말은 아직도 권위가 있어 지역 공무원들도 존중한다. 그는 지역사회의 절대적 신임을 바탕으로 1987년 임종 직전 아버지가 당부한 세 가지 유업을 완수하는 데 전념했다. 우선 산속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건립했다. 그리고 미완성된 '부랑족 역사서'를 마무리했다. 마지막으로 문화대혁명 당시 파괴된 파아이렁사를 재건하며 상좌부 불교(부처의 계율을 원칙대로 고수하는 불교)와 결합해 그들의 조상, 파아이렁을 역사에서 신화의 세계로 올렸다.
수궈원은 파아이렁이 당부한 유지를 잘 받들어온 부랑족의 후예답게 차나무를 증식시켜 망징산과 징마이산을 세계최대 고차수 단지로 만드는 데 평생을 바쳤다. 세계최대 고차수 단지로 인정받은 망징산과 징마이산은 중국민간문화유산 관광 시범구로 선정되어 자연 친화형 관광특구로 개발되고 있다. 건국 60주년을 맞이한 가을 그 당시 주석 후진타오에게 수궈원은 부랑족의 명품차, 차혼을 아버지가 그랬듯이 대를 이어 선물했다. 그는 천안문 망루에서 기념식을 참관하도록 초대받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베이징으로 떠나는 모습이 생각난 듯 그는 순간 울컥했다. CCTV 제작진의 촬영은 이 대목에서 끝났지만, 그와 나의 차茶 이야기는 밤새 꽃피웠다.
월간산 11월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