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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학의 ‘꽃’(1985). 이름 모를 꽃들이 뒤엉켜 저마다의 외양과 색채를 뽐내고 있다. 표현적인 붓질, 두꺼운 물감, 거친 표면효과 등으로 작가의 화려한 꽃들은 여리여리한 여성성을 벗고 강인한 남성성을 입고 있다. 작가는 현대미술에서 다소 진부하다고 할 꽃 소재를 독특한 조형의식으로 구체화하며 원시적 건강성을 제시했다. 1979년부터 시작된 설악산 시절 초기에는 어두운 녹색과 스러져가는 꽃, 겨울풍경이 자주 나타났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생명력 넘치는 야생화의 향연장이 됐다. 선명한 색채를 위해 전통적인 묘사도 거부했다. “직접 꽃잎을 따다가 화면에 대보기를 수십 번 반복하며 색을 만든다”고 야마토연타 말하기도 했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 80×10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문득 사는 일을 돌아보니 그랬습니다. 지켜내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오롯이 세월을 지키는 일 말입니다. 한국미술이 먼 릴게임황금성 저 떠오릅니다. 척박한 세상살이에 미술이 무슨 대수냐고, 그림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데일리가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그 쉽지 않았던 한국근현대미술 100년을 더듬습니다. 이건희컬렉션을 입고 더욱 깊어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통해섭니다. 5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과천에서 ‘MMCA 상설전’이란 타이틀 아래 미련 없이 펼쳐내는 300여 점, 체리마스터모바일 그 가운데 30여 점을 골랐습니다. 주역을 찾진 않았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오롯이 세월을 지켜온 작품을 우선 들여다봤습니다. ‘열화’입니다. ‘뜨거운 그림’이란 의미고, ‘식을 수 없는 그림’이란 의지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주>
[정하윤 미술평론가] “돈이 아무리 많아도 행복을 살 손오공게임 수는 없단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건넨 그 한마디가 평생 마음속에 남았다. 전쟁과 상실이 다 휩쓸고 지나간 뒤 설악산으로 들어가 칩거를 시작한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 아닐까. 자연을 그리며 잃어버린 행복을 다시 만들어가려고 말이다.
‘설악산의 화가’로 불리는 김종학(88)은 1937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 우주전함야마토게임 났다. 당시 신의주는 외국 상인과 선박이 오가는 항구로, 한반도 북부 무역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한 뒤 신의주 일대에서 광산업으로 성공한 기업가였고, 어머니는 중국 난징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교양 있는 신여성이었다. 생활은 넉넉했지만 1940년대 초 청일전쟁으로 신의주 일대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부모는 자녀들과 함께 평안북도의 본가로 거처를 옮겼다.
어려운 시절이었음에도 따뜻한 가정은 김종학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돼 줬다. 세 살 무렵부터 그가 벽마다 낙서를 해대자 그 모습을 본 부모와 할아버지는 “법은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지만 그림은 그렇지 않다”며 차라리 그가 화가가 되기를 바랐다. 김종학은 그런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산천을 거닐며 유년기를 보냈다.
평안도서 부유했던 집안, 광복 이후 무일푼으로 남하
1945년 광복 이후 시대가 요동쳤고 김종학의 집안은 크게 흔들렸다. 소련군이 북한지역에서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에게 분배를 하자 크게 재산을 일군 그의 아버지는 처단해야 할 인물로 지목됐다. 결국 아버지는 전 재산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가족의 생명을 보장받았고 가족은 남쪽으로 피란길에 올랐다. 열두 살 김종학은 정든 고향을 떠나던 기차역에서 세상을 다 잃은 듯 엉엉 울었다.
남쪽에서의 삶은 고단했다. 무일푼으로 맞닥뜨린 현실은 곧 한국전쟁의 참혹한 포화 속으로 이어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 김종학은 어렵사리 학교를 마쳤다. 그나마 미술선생님이 이따금 보여주는 서양화가들의 화집이 그의 마음에 작은 기쁨을 주었다.
1956년 김종학은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고 중학교 시절에는 ‘반 고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으니, 그의 미대 진학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대학 시절 그가 발표한 작품들은 강렬하면서도 처절했다. ‘작품 603’(1963)이 한 예다.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해골처럼 비틀린 모습으로 힘없이 앉아 있다. 격렬한 붓터치와 두껍게 바른 물감은 격렬한 전투가 끝난 뒤의 폐허를 연상시킨다. 한국전쟁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그림에는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행한 시절을 견뎌야 했던 세대의 절망과 분노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김종학의 ‘작품 603’(1963). 1962년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즈음의 작품이다. 해골처럼 비틀린 채 힘없이 앉은 인물의 형상이 보인다. 불운한 시대를 견뎌내야 했던, 절망과 분노가 고스란히 밴 인간의 실존적인 몸부림이 어둡고 격렬한 붓터치를 타고 올랐다. 지난 6월 26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한 ‘MMCA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Ⅱ’에 걸렸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 95.2×144㎝.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50년대 후반 한국 미술계에는 이처럼 거친 표현과 강렬한 감정이 두드러진 작품 경향이 나타났다. 프랑스 전후 추상미술 ‘앵포르멜’(Informel)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쟁의 상흔과 절망을 예술로 토해내는 움직임이었다. 전쟁을 경험한 프랑스 작가들의 ‘앵포르멜’이 지닌 거친 표현과 스산한 분위기는, 마찬가지로 파괴와 상실의 시대를 겪은 한국 전후 세대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물감이 잔뜩 묻은 붓을 거칠게 휘두르며 전쟁이 앗아간 청춘의 절규를 캔버스에 쏟아냈다. 또한 기성 화단의 보수적 제도에 반발해 미술단체를 결성하고, 덕수궁 담벼락에 직접 작품을 걸어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권위에 도전하기도 했다. 김종학은 1970년까지 이 흐름에 동참하며 동료들과 함께 한국미술사의 새로운 장을 써 내려갔다.
격렬했던 추상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자 화가들은 각자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김종학은 판화와 설치미술에도 도전했지만 기존 작업의 한계를 느끼고 1977년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뉴욕에 도착한 그는 그동안 책으로만 접하던 서구미술을 비로소 눈앞에서 마주했다. 당시 뉴욕은 추상미술의 전성기가 지나고 다양한 새로운 경향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김종학은 그곳에서 오랫동안 품어온 서구미술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열등감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서로 다른 예술이 공존할 수 있음을 실감했다. 무엇보다 예술은 결국 각자가 지닌 개성과 시선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79년 마흔둘의 김종학은 가정불화로 인해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게 됐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와 향한 곳은 설악산. 그곳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형이 마련해준 설악산 자락의 별장에서 그는 몇 달 동안 별장 관리인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 고립된 생활을 이어갔다. 가정과 화업 모두에서 실패했다는 생각이 그를 짓눌렀고, 설악산의 숲과 계곡을 무작정 헤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결심했다. “자식들이 자랑할 만한 작품 100점만 남기고 죽자.” 김종학은 소 외양간을 개조해 작업실을 만들었다.
화가 김종학. 1979년 마흔둘의 김종학은 모든 걸 버리겠다 작정하고 설악산 칩거를 시작했다. 시멘트로 지은 소 외양간 건물을 개조한 작업실에 틀어박혀 설악산 사철의 자연을 그려댔다. 설악산 시기는 20여 년간 이어졌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00점만 남기고 죽자”…자연서 ‘다시 살아갈 힘’ 얻어
무엇을 그릴지 막막하던 때, 제멋대로 얽히고설킨 덩굴과 숲의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모습 속에서 김종학은 질서와 균형, 조화를 발견했고 그 안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느꼈다. 특히 아침과 저녁마다 마주한 꽃의 아름다움은 생의 의미를 잃었던 그에게 깊은 위안이 됐다. 그렇게 그는 방대한 화면 속에 설악의 꽃을, 자연의 생명력을 가득 담기 시작했다.
이전의 추상화가 절망의 감정을 토해내는 작업이었다면 이제는 고통 속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붙잡았다. 자연이라는 구체적인 소재가 생겼고 색채는 비할 수 없이 밝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화면에는 거친 붓질이 남아 있었다. 중학교 시절 인상 깊게 다가왔던 반 고흐의 흔적이 섞인, 그만의 뜨거운 에너지였다.
당시 화단에서 꽃 그림은 상업적이라는 이유로 진지하게 평가받지 못했다. 한번도 돈을 좇아 그린 적이 없는 김종학으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유행이나 평단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기로 결심한 터였다. 꽃을 그린다는 이유로 삼류작가로 치부되더라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꽃과 나비, 숲과 덩굴 등 자연 속 생명체를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꾸준히 구축해 나갔다. 때로는 5m가 넘는 대작에 설악산의 생명력을 고스란히 담아내기도 했다.
김종학의 ‘No.13’(2006). 20여 년간 설악산에서 자연에서 삶을 찾아냈던 작가가 2000년대 중반 다시 더듬은 설악산 풍경이다. 잔설이 남은 산등성이, 능선을 따라 불쑥 솟아오른 봉우리, 눈 사이사이로 몸통을 드러낸 나목, 슬금슬금 피기 시작한 분홍 진달래 등 과장하거나 축소하지도 않은, 있는 그대로의 설악을 옮겨냈다. 캔버스에 아크릴릭 물감, 91×29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80년대 개인전을 통해 김종학은 ‘색채의 화가’라는 별칭을 얻으며 예상보다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평단의 평가도 호의적이었고 대중적 인기도 높아졌다. 201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은 특히 의미가 깊었다. 50여 년의 화업을 조망한 이 전시를 통해 그는 ‘상업적’이라는 오랜 편견을 넘어 예술성을 입증해냈다.
아흔을 바라보는 김종학은 오늘도 꽃을 바라본다. 노화가의 시선과 손끝에서 피어나는 세상은 여전히 생명으로 충만하다. 최선을 다해 피어나 영롱한 빛을 터뜨리는 꽃, 거침없는 기세로 뻗어나가는 덩굴, 생명을 품은 숲. 절망의 끝에서 화가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운 자연의 형상은 그의 그림 앞에 선 이들에게도 생기를 불어넣는다. 자연은, 그리고 그림은, 이렇게 삶을 다시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김종학의 ‘자화상’(1994). “사람도 꽃처럼 다양하게 생겨 흥미롭다.” 비록 꽃그림에 자주 가려졌지만 작가는 1950년대부터 쉬지 않고 인물을 그려왔다. 뭔가 구체적인 대상이나 구상화를 그리고 싶을 때 사람을 그렸다고 했다. 아무나도 아니지만 누구나의 얼굴이기도 한 자신의 인물화를 두고 “인간의 몸을 빌린 자연”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 73×60.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오현주 (euanoh@edaily.co.kr) 기자 admin@seastorygame.top
문득 사는 일을 돌아보니 그랬습니다. 지켜내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오롯이 세월을 지키는 일 말입니다. 한국미술이 먼 릴게임황금성 저 떠오릅니다. 척박한 세상살이에 미술이 무슨 대수냐고, 그림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데일리가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그 쉽지 않았던 한국근현대미술 100년을 더듬습니다. 이건희컬렉션을 입고 더욱 깊어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통해섭니다. 5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과천에서 ‘MMCA 상설전’이란 타이틀 아래 미련 없이 펼쳐내는 300여 점, 체리마스터모바일 그 가운데 30여 점을 골랐습니다. 주역을 찾진 않았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오롯이 세월을 지켜온 작품을 우선 들여다봤습니다. ‘열화’입니다. ‘뜨거운 그림’이란 의미고, ‘식을 수 없는 그림’이란 의지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주>
[정하윤 미술평론가] “돈이 아무리 많아도 행복을 살 손오공게임 수는 없단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건넨 그 한마디가 평생 마음속에 남았다. 전쟁과 상실이 다 휩쓸고 지나간 뒤 설악산으로 들어가 칩거를 시작한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 아닐까. 자연을 그리며 잃어버린 행복을 다시 만들어가려고 말이다.
‘설악산의 화가’로 불리는 김종학(88)은 1937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 우주전함야마토게임 났다. 당시 신의주는 외국 상인과 선박이 오가는 항구로, 한반도 북부 무역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한 뒤 신의주 일대에서 광산업으로 성공한 기업가였고, 어머니는 중국 난징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교양 있는 신여성이었다. 생활은 넉넉했지만 1940년대 초 청일전쟁으로 신의주 일대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부모는 자녀들과 함께 평안북도의 본가로 거처를 옮겼다.
어려운 시절이었음에도 따뜻한 가정은 김종학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돼 줬다. 세 살 무렵부터 그가 벽마다 낙서를 해대자 그 모습을 본 부모와 할아버지는 “법은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지만 그림은 그렇지 않다”며 차라리 그가 화가가 되기를 바랐다. 김종학은 그런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산천을 거닐며 유년기를 보냈다.
평안도서 부유했던 집안, 광복 이후 무일푼으로 남하
1945년 광복 이후 시대가 요동쳤고 김종학의 집안은 크게 흔들렸다. 소련군이 북한지역에서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에게 분배를 하자 크게 재산을 일군 그의 아버지는 처단해야 할 인물로 지목됐다. 결국 아버지는 전 재산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가족의 생명을 보장받았고 가족은 남쪽으로 피란길에 올랐다. 열두 살 김종학은 정든 고향을 떠나던 기차역에서 세상을 다 잃은 듯 엉엉 울었다.
남쪽에서의 삶은 고단했다. 무일푼으로 맞닥뜨린 현실은 곧 한국전쟁의 참혹한 포화 속으로 이어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 김종학은 어렵사리 학교를 마쳤다. 그나마 미술선생님이 이따금 보여주는 서양화가들의 화집이 그의 마음에 작은 기쁨을 주었다.
1956년 김종학은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고 중학교 시절에는 ‘반 고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으니, 그의 미대 진학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대학 시절 그가 발표한 작품들은 강렬하면서도 처절했다. ‘작품 603’(1963)이 한 예다.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해골처럼 비틀린 모습으로 힘없이 앉아 있다. 격렬한 붓터치와 두껍게 바른 물감은 격렬한 전투가 끝난 뒤의 폐허를 연상시킨다. 한국전쟁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그림에는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행한 시절을 견뎌야 했던 세대의 절망과 분노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김종학의 ‘작품 603’(1963). 1962년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즈음의 작품이다. 해골처럼 비틀린 채 힘없이 앉은 인물의 형상이 보인다. 불운한 시대를 견뎌내야 했던, 절망과 분노가 고스란히 밴 인간의 실존적인 몸부림이 어둡고 격렬한 붓터치를 타고 올랐다. 지난 6월 26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한 ‘MMCA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Ⅱ’에 걸렸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 95.2×144㎝.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50년대 후반 한국 미술계에는 이처럼 거친 표현과 강렬한 감정이 두드러진 작품 경향이 나타났다. 프랑스 전후 추상미술 ‘앵포르멜’(Informel)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쟁의 상흔과 절망을 예술로 토해내는 움직임이었다. 전쟁을 경험한 프랑스 작가들의 ‘앵포르멜’이 지닌 거친 표현과 스산한 분위기는, 마찬가지로 파괴와 상실의 시대를 겪은 한국 전후 세대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물감이 잔뜩 묻은 붓을 거칠게 휘두르며 전쟁이 앗아간 청춘의 절규를 캔버스에 쏟아냈다. 또한 기성 화단의 보수적 제도에 반발해 미술단체를 결성하고, 덕수궁 담벼락에 직접 작품을 걸어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권위에 도전하기도 했다. 김종학은 1970년까지 이 흐름에 동참하며 동료들과 함께 한국미술사의 새로운 장을 써 내려갔다.
격렬했던 추상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자 화가들은 각자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김종학은 판화와 설치미술에도 도전했지만 기존 작업의 한계를 느끼고 1977년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뉴욕에 도착한 그는 그동안 책으로만 접하던 서구미술을 비로소 눈앞에서 마주했다. 당시 뉴욕은 추상미술의 전성기가 지나고 다양한 새로운 경향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김종학은 그곳에서 오랫동안 품어온 서구미술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열등감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서로 다른 예술이 공존할 수 있음을 실감했다. 무엇보다 예술은 결국 각자가 지닌 개성과 시선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79년 마흔둘의 김종학은 가정불화로 인해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게 됐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와 향한 곳은 설악산. 그곳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형이 마련해준 설악산 자락의 별장에서 그는 몇 달 동안 별장 관리인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 고립된 생활을 이어갔다. 가정과 화업 모두에서 실패했다는 생각이 그를 짓눌렀고, 설악산의 숲과 계곡을 무작정 헤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결심했다. “자식들이 자랑할 만한 작품 100점만 남기고 죽자.” 김종학은 소 외양간을 개조해 작업실을 만들었다.
화가 김종학. 1979년 마흔둘의 김종학은 모든 걸 버리겠다 작정하고 설악산 칩거를 시작했다. 시멘트로 지은 소 외양간 건물을 개조한 작업실에 틀어박혀 설악산 사철의 자연을 그려댔다. 설악산 시기는 20여 년간 이어졌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00점만 남기고 죽자”…자연서 ‘다시 살아갈 힘’ 얻어
무엇을 그릴지 막막하던 때, 제멋대로 얽히고설킨 덩굴과 숲의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모습 속에서 김종학은 질서와 균형, 조화를 발견했고 그 안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느꼈다. 특히 아침과 저녁마다 마주한 꽃의 아름다움은 생의 의미를 잃었던 그에게 깊은 위안이 됐다. 그렇게 그는 방대한 화면 속에 설악의 꽃을, 자연의 생명력을 가득 담기 시작했다.
이전의 추상화가 절망의 감정을 토해내는 작업이었다면 이제는 고통 속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붙잡았다. 자연이라는 구체적인 소재가 생겼고 색채는 비할 수 없이 밝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화면에는 거친 붓질이 남아 있었다. 중학교 시절 인상 깊게 다가왔던 반 고흐의 흔적이 섞인, 그만의 뜨거운 에너지였다.
당시 화단에서 꽃 그림은 상업적이라는 이유로 진지하게 평가받지 못했다. 한번도 돈을 좇아 그린 적이 없는 김종학으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유행이나 평단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기로 결심한 터였다. 꽃을 그린다는 이유로 삼류작가로 치부되더라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꽃과 나비, 숲과 덩굴 등 자연 속 생명체를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꾸준히 구축해 나갔다. 때로는 5m가 넘는 대작에 설악산의 생명력을 고스란히 담아내기도 했다.
김종학의 ‘No.13’(2006). 20여 년간 설악산에서 자연에서 삶을 찾아냈던 작가가 2000년대 중반 다시 더듬은 설악산 풍경이다. 잔설이 남은 산등성이, 능선을 따라 불쑥 솟아오른 봉우리, 눈 사이사이로 몸통을 드러낸 나목, 슬금슬금 피기 시작한 분홍 진달래 등 과장하거나 축소하지도 않은, 있는 그대로의 설악을 옮겨냈다. 캔버스에 아크릴릭 물감, 91×29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80년대 개인전을 통해 김종학은 ‘색채의 화가’라는 별칭을 얻으며 예상보다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평단의 평가도 호의적이었고 대중적 인기도 높아졌다. 201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은 특히 의미가 깊었다. 50여 년의 화업을 조망한 이 전시를 통해 그는 ‘상업적’이라는 오랜 편견을 넘어 예술성을 입증해냈다.
아흔을 바라보는 김종학은 오늘도 꽃을 바라본다. 노화가의 시선과 손끝에서 피어나는 세상은 여전히 생명으로 충만하다. 최선을 다해 피어나 영롱한 빛을 터뜨리는 꽃, 거침없는 기세로 뻗어나가는 덩굴, 생명을 품은 숲. 절망의 끝에서 화가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운 자연의 형상은 그의 그림 앞에 선 이들에게도 생기를 불어넣는다. 자연은, 그리고 그림은, 이렇게 삶을 다시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김종학의 ‘자화상’(1994). “사람도 꽃처럼 다양하게 생겨 흥미롭다.” 비록 꽃그림에 자주 가려졌지만 작가는 1950년대부터 쉬지 않고 인물을 그려왔다. 뭔가 구체적인 대상이나 구상화를 그리고 싶을 때 사람을 그렸다고 했다. 아무나도 아니지만 누구나의 얼굴이기도 한 자신의 인물화를 두고 “인간의 몸을 빌린 자연”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 73×60.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오현주 (euanoh@edaily.co.kr) 기자 admin@seastorygame.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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